제13장 서로 다를수 있는 권리 - 식사법적으로 옳은 것
제13장 서로 다를수 있는 권리
식사법적으로 옳은 것
2001년 2분기
정치적, 종교적, 성적 사고방식의 획일화 목록에 이제 우리는 “획일화된 맛” 의 항목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 우리에게 “식사법적으로 옳은” 것을 먹게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프랑스 요리사가 최근 유전자 개량식품에 항의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토양에서 나오는 다양한 생물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맛의 규격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상에는 동일한 맛을 지닌 오직 한 종류의 토마토만 남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는 정말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할 일 이란 아무 것도 모르는 일에 대해 뭐라고 지껄이는 대신 주방에 돌아가 양념 맛이나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전자 개량식품이나 복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유전자 개량식품은 식물의 다양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 더욱 맛있는 다른 식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풍미 없고 수분만 가득찬 딸기 대신 강한 야생딸기의 맛을 지닌 매우 커다란 딸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딸기는 매우 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만 먹어도 훌륭한 디저트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운반과 보관 도 훨씬 용이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전혀 새로운 색깔과 맛을 지닌 과일과 야채들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닐라 맛이 나고 토마토처럼 둥근 푸른색 바나나를 만든다거나 사과만큼 크고 계피맛 이 나는 백포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맛도 뛰어날 것 입니다. 요리사들의 상상력이 유전공학 기술과 합쳐지면 수많은 문화와 지역적 식성에 적합하고 다양한 맛을 지닌 수천 종의 다른 식물들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식사법적으로 옳은 것” 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동물의 종류에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왜 어떤 동물들은 먹어도 되고 어떤 동물들은 안되는가요? 참치는 먹을 수 있지만 돌고래는 손대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이상한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 프랑스 여배우가 한국의 개고기 식용 관습을 금지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 식사법의 대가들이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많은 동물들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 개탄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그들부터 귀여운 눈망울을 가졌던 송아지 고기를 그들 접시 위에 올려놓지 말아야 하고, 그토록 귀여웠던 병아리에서 성장한 닭고기를 거부해야 하며 3주일 동안이나 불쌍한 거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해 만든 거위 간 요리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어찌 어떤 동물은 먹어도 된다고 하면서 다른 동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칠 수 있단 말인가요! 잘 조리된 한국의 개고기가 닭튀김 요리를 먹는 것보다 더 나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정치적으로 옳은 자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릴 수 있습니다. 다음 휴일 불그레한 얼굴에 살이 두툼하게 찐 그들 은 야만인들에게 희생되고 있는 불쌍한 동물들에 대해 개탄하면서 포와그라(거위 간 요리)를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을 것입 니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이 한국의 개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동안 미국인들은 달팽이와 개구리 다리, 토끼를 먹는 프랑스인들, 살아 있는 생선을 즐겨 먹는 일본인들을 보고 메스꺼워 합니다.
그럼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요?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은 식물도 그들의 환경을 인식하며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당근을 땅에서 뽑아 올릴 때 또는 상추를 칼로 썰 때 너무 큰 고통을 주므로 우리는 당근이나 상추를 먹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유와 치즈는 어떻습니까? 새끼들을 먹이려고 생산하는 우유를 훔치기 위해 소를 기르면서, 죽은 동물들을 갈아 만든 사료를 먹여 광우병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식물들에게 고통을 주며 만든 식물사료를 먹이는 것이 용납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계란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배아에서 추출 한 줄기세포의 이용을 비난하는 생명옹호론자들의 요란한 아우성을 고려해볼 때, 틀림없이 그 늙은 여배우는 계란에서 태어 나게 될 귀여운 병아리의 이름으로 이렇게 목청을 높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살게 하라 !" 틀림없이 태어날 “ 병아리의 권리를 옹호하는 협회”가 창설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란도 안 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먹을수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바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벌써 “지구의 친구들” 과 다른 환경주의자들이 눈썹을 치켜 세우면서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 지구” 가 “영혼” 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은 죽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벌레들과 박테리아들이 우리를 먹으며 잔치를 벌이겠지요. 그것들에게는 아무런 죄의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것 들은 인간에게 기쁨을 주고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엘로힘이 창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포함됩니다. 유일한 규칙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가능한 한 적은 고통을 주며 죽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학대받은 프랑스의 송아지 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고통 없이 죽인 한국의 개고기를 먹겠습니다.
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음식들을 거의 모두 먹어봤습니다. 상어, 악어, 거북이, 돌고래, 고래, 비버, 타조, 들소, 해파리, 말, 심지어 아프리카 메뚜기까지 먹어본 적 있습니다. 다음번 한국을 방문할 때는 기꺼이 개고기를 시식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개는 확실히 고통 없이 죽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나는 닭이 전기로 가동되는 양계장에서 사육되었거나 학대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닭고기를 먹지 않으며 그리고 ‘포와그라’ 에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물 차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동물은 먹어도 되고 어떤 동물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식사법적으로 옳은” 말일 뿐입니다. 만약 송아지가 말을 할 줄 안다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왜 개가 아니고 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