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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비폭력

부활절

2003년 4월,몬트리올

오늘 전 세계에서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논리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이란 신이 개입된 것으로서 완전히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람들이 기념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복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요. 그들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죽음에 대한 과학의 승리” 를 축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은 없습 니다.

부활절은 또한 한량없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보낸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그들은 지구인들에 의해 방금 희생되었던 그들의 아들을 다시 재생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 의 생명이 인류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의 혜택으로 예수는 인간 세계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사랑에 대해 말하고 이 지구에서 사랑과 의식과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그것은 선 과 악의 싸움이었으며 의식과 어리석음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한다고 주장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하는 짓이란 도대체 어떤가요? 그들은 그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닙니다! 벽에다 걸어두기도 하고 교회를 장식하기도 합니다. 가장 잔인한 방법 으로 예수를 죽인 바로 그 도구를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칼로 목이 잘려 죽었다면 그들은 예수를 기억하기 위해 작은 칼을 목에 걸고 다닐까요?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요! 예수에게 고통을 준 상징물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예수를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는 십자가를 증오합니다.

인간의 잔인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인간들은 엘로힘의 메신저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는 사랑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너희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라는 말을 해주러 왔습니다. 이 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아주 원시적인 그 전의 말을 대체하는 것이었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은 “누가 너를 때리면 너도 그를 때려라. 누가 너를 공격하면 너도 그 에게 반격하라.”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사랑과는 전혀 다릅니다.

유태인 중 한사람이었던 예수는 유태인들에게 가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밀어라.” “친구보다 적을 더 사랑하라, 적들은 너의 친구들보다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네가 이미 사랑 하고 있지 않느냐? 누가 너를 미워하면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해주라.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때리고 싶으면 때려라. 그러나 너는 너의 양심에 짐을 지고 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해주라.”

이것은 너무나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으며, 이 때문에 예수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비폭력의 가장 위대한 상징은 의문의 여지 없이 예수와 간디입니다. 간디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 에 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죽여라, 그러나 우리는 손가락 하나 들지 않을 것이며 복수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달라이 라마도 티베트를 위해 동일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무장봉기를 선동하고 중국인 들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부추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폭력은 절대 안 된다. 때가 되면 인간의 의식이 자랄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 사이에는 이해심이 생기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사랑과 비폭력입니다. 사랑이 증오를 대신하지 않는 한, 사랑이 폭력을 이기지 못하는 한, 오른 뺨을 맞았을 때 왼 뺨 내밀기를 거부하는한,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구는 아름다운 곳이며 구원할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사랑 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창조자들의 이름으로 예수의 메시지를 완성시키는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인류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엘로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엘로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여러분에게 인류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전 지구를 감염시킬 수 있는 사스 환 (SARS) 자 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명분으로 첫 번째 사람을 죽이면 앞으로 수백만 명을 더 죽일 수 있게 됩니다. 나치에게 죽임을 당한 첫 번째 유태인 뒤에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의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 의 살해를 받아들이면 그 다음 사람의 살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만으로 제한 시킬 방도는 없습니다. 한 사 람을 죽였다면 두 사람은 왜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두 사람을 죽이면 네 사람은 왜 안 되겠습니까? 네 사람을 죽이면 여덟 사람은 왜 안 되겠습니까? 여덟 사람을 죽이면 수백만 명은 왜 안 되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떤 명분으로든 처음에 죽일 사람입니다.

한 영국 기자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이라크에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불쌍한 이라크 어린이가 팔다리와 부모를 잃고 온몸의 60% 가 넘는 부위에 화상을 입어 생존할 수 있을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데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아이를 두고 “부수적인 피해” 라고 말합니다. 이것보다 더 역겨운 말은 없습니다.

시간과 국민 그리고 의식은 아이들의 팔을 잃게 할 필요 없이 언제나 독재자들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간디는 이원칙이 옳으며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 아이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거울 삼아 더이상의 잔혹한 행위를 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타인 의 고통을 이용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용해야만 합니다. 강제수용소에 갇혀 거의 굶어 죽다시피 된 불쌍한 유태인들이 열을 지어 가스실로 들어가는 사진을 이용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지구상의 어떤 독재자나 정부라도 어떤 명분 으로든 단 한 사람이라도 감히 죽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부활절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 에게 가져다준 사랑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오늘 나는 우리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비폭력의 본보기인 엘로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절대적인 세 가지 규칙과 함께 여러분에게 그들의 더욱 큰 사랑을 전해드립니다.

어떤 명분으로든 단 한 사람의 생명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구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안 됩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그를 보호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누가 나를 죽이기를 원한다면 그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나의 목숨을 주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해결책이 언제나 있으니까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강요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고통을 주는 명령 에는 복종하기를 거부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명령이 자신의 양심에 반하거나 세계인권헌장에 위배될 경우 그것에 따르기를 거부해야만 합니다. 비록 그명령이 엘로힘 또는 그들의 예언자가 내리는 것일지라도 그렇습니다.

명령에 따르는 사람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동일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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