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4. 지적설계/인간복제

결론

우재1 2023. 7. 7. 11:27
반응형

결론

우리는 지금 얼마나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는가!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현재 인류의 문명은 과학에 의해 영원한 생명이 가능해지고 노동 의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황금시대의 바로 문턱에 와있다. 오늘날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명 및 발견이 가져다 준 다양한 혜택 을 누리며 갖가지 쾌락을 즐기고 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접어두고, 그 모든 발명가들을 생각해보자.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발명가들은 어리석은 동시대인들의 편견에 시달리고 조롱받았다.

내 귀에는 그 모든 근시안적인 바보들의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바퀴를 발명한 사람이 그의 발명품을 그들 앞에 보여주자. 그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댄다. 그리고는 “이런 것이 움직일 리가 없어 !” 라고 하며 그에게 손가락질하고 놀려댄다. 한치 코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바보들이 바닥을 구르며 웃던 그 웃음소리 의 여운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다.

그들은 처음으로 수도를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 말을 타자고 제안 한 사람을 비웃었다. 글씨를 처음 쓴 사람, 종이를 발명한 사람도 비 웃었고, 증기기관, 전기, 세탁기를 발명한 사람도 비웃었다. 또 그들은 달여행을 제안한 사람도 비웃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모두 조롱받았다. 옷에 다는 단추, 안경, 볼펜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근시안적 인 바보들은 배를 잡고 웃어대며 그 발명자들을 조롱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천재들이 그런 바보들 에게 설욕하는 시대이다. 마침내 「혁신」 이라는 개념이 가치있는 상품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혁신을 추구하고 혁신을 장려하며 심지어 혁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부부처까지 생겨났다.

“옛날부터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되는거야” 라는지 독한 집단적 어리석음이 마침내 “과거 어리석었던 조상들은 이런 방식으로 해왔지만, 더 좋은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야” 라는 새롭고 멋진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극히 최 근까지도 훌륭한 발명품들이 기존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로 부터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발명품들을 조롱하며 무시 해버린 대가로 그들은 큰 손해를 보기도 한다.

좋은 예로서 수정시계의 발명을 들 수 있다. 수정시계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스위스 시계업계는 그것을 바보같은 아이디어라고 거부 했지만 일본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일본의 시계산업은 전세계 시계의 80%를 점유하게 되었는데, 이 점유율은 수정시계 발명 이전까지만 해도 스위스가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수정시계의 발명자는 바로 스위스인이었다! 발명가 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그를 비웃은 대가로 수천 개의 스위스 시계회사들이 도산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다!

복사기, 컴퓨터, 전화, 자동차, 전구 등이 발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젊은 사람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라 도 “사람들은 과거부터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것을 해왔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살다간 원시적인 바보들이 하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고 “ 옛날 사람들도 결국 그토록 어리석지는 않았어” 라고 말하며 좋게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더 좋은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것에는 개선할 수 있는 방 법이 있다. 개선하는 것은 현재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물이라도 영원히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젊은 두뇌들이 우리 조상들로 부터 물려받은 모든 문화적 유산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우리의 가장 큰 적 (敵)은 부모들과 교육자들에 의해 주입된 사고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발명가라는 것은 통상 혁명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적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할 수 없다.

신인류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자질은 게으름이다.

모든 위대한 발명들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결과를 다른 사람만큼 노력하지 않고 거두기를 원했던 가장 게을렀던 사람들로부터 나온 작품들이다.

멀리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보다 수도에서 물을 받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든다. 보일러에서 뜨거운 물이 바로 나온다면 우리 손으로 직접 나무를 베어다가 불을 붙여 물을 데우는 것보다 힘을 훨씬 덜 소모해도 된다. 세탁기가 있으면 빨래하러 강까지 먼길 을 갈 필요가 없다. 자동차가 발명된 덕분에 우리는 항상 말을 보살피고 쇼핑하러 가고 싶을 때 마다 말에게 먹이를 주어야만 하는 일로 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휴대용 전자계산기는 손과 두뇌를 이용하여 해야만 했던 모든 복잡하고 긴 계산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었다.

그러나 유대- 기독교적 전통은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 일용할 빵을 얻는 것” 은 부도덕한 일이며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수고를 통해서 빵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소수의 지독한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아무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끝없는 쾌락 속에서 삶을 즐기며, 아무도 노동할 필요가 없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느라 피곤해질 필요도 없는 진정한 문명세계가 처음으로 탄생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탄생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기본적인 자질을 배양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기술과 관습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자질과 게으름의 자질, 이 두 가지야 말로 임박한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앞당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게으름은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그것이 에너지의 절약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원을 아끼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것은 특히 산업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최소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생물학적 균형은 게으름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과학자들은 동물들의 에너지 운용이 초효율적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경외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동일한 중량으로 대비할 경우 인간이 만든 어떠한 비행기도 새의 에너지 효율에는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게으름」 을 「무기력」 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게으름이 창조성과 생산성의 동기가 될 수 있는 반면 무기력은 철저하게 비생산적이며 두뇌를 위축시킬 따름이다.

게으름은 보다 적은 노력으로써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고 노력하 는 일이다. 그렇지만 「완전함 」 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바로 이 점이 발명가들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나노테크놀로지에 의해 사람들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사회는 쾌락의 사회가 된다.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필요에 쫓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쾌락을 위해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신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대신 한 시간 동안 걸어서 갈 수가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든지 과학연구를 위해 노력할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순수한 기쁨을 얻기 위해 할 것이다.

춤을 춘다거나 비디오게임을 한다거나 사랑을 나누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세계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혁명적이 되라!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그 세계를 앞당기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즐거움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그 즐거움이 중단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권리를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유대 - 기독교적 패러다임에 집착하고 있는 늙은 국회의원들에 도전하여 정치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 즉 생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결코 죽지 않을 권리」 를 허용하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의 세대를 위한 법률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이미 죽음을 받아 들인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의 머리 속은 이미 죽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기를 원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살 권리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있는데도 왜 누구의 이름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죽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죽기를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공간을 보다 여유있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죽음을 강요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선택한 것을 알면서 자기는 죽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질투이다.

원하는 대로 살게 하고, 원하는 대로 죽게 하라.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살게 두어야만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죽음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사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자유이다.

우리는 매순간 자신의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신의 모든 모공 하나 하나를 통해 기쁨을 즐기며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주위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작은 변화들을 의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영원한 변화의 세계에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삶은 가슴뛰는 일이 된다.

오늘 당신의 삶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훈련으로 생각하라.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행복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당신이 참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달라이 라마 또한 이렇게 말했다. “컴퓨터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 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긍정적인 카르마(=업)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이 진실로 원한다면 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모든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명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는 것이다.

반응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