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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나의 주요 관심사는 동물들이었으며 달팽이 경주를 시키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동물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동물들의 세계에 매혹된 나는 신비스러운 동물들이 사는 처녀림을 헤치고 나가는 탐험가 가 되는 것을 꿈꾸곤 했다.

그러나 아홉 살 때 (9라는 숫자가 다시 나온다) 모든 것이 변했다. 처음으로 나는 어디에 나의 참된 정열을 바칠 것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모터가 있든 없든, 바퀴로 달리는 스피드였다. 스피드와 특히 궤도운동에서 느끼는 균형감각, 자신과의 싸움, 즉 자신의 반사신경과의 싸움 - 말하자면 정신에 의한 육체의 완전한 지배였다.

 

처음에는 브레이크도 없는 작은 자전거로 맹렬하게 달렸다. 한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더욱 어려운 시도를 해보기 위해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 고속으로 달리는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차가 오면 맹렬하게 질주해서 그 차를 추월하고는 운전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언덕을 내려간 다음에는 다시 올라가 다음 차를 기다리곤 했다.

 

몇 개월 후 나는 우연히 프랑스 횡단 자동차 경주를 보게 되었는데 첫눈에반해 버렸다. 페달을 밟아 언덕을 다시 오를 필요도 없이 스피드를 즐길 수 있다니, 더구나 직업적으로도 택할 수 있다니 꿈만 같이 여겨졌다. 나도 카레이서가 되어야겠다! 아홉 살 난 아이들이 그렇듯,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그 날 이후 내 생활은 자동차 경기를 중심으로 맴돌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카레이서가 되기로 결심한 이래 학교에서의 공부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즐겨보던 만화책은 자동차 전문잡지로 바뀌었고 내가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해가 몇 해나 남았나 를 초조하게 헤아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기숙학교에 보내진 것도 아홉 살 때였다. 내가 학교 공부 를 싫어하고 또 카레이서가 되는 데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끈질기게 주장하자 절망적이 된 어머니는 퓨이 앙 베레에 있는 노틀담드 프랑 사립학교에 나를 보내기로 결심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자동차 잡지만 없으면 공부에 열중하리라고 생각하셨다. 그 생각은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첫 번째 기숙학교에 대해서는 기억하기 싫은 추억들만 남아있는데 아마도 너무 어릴 때 들어간 탓이리라. 그 큰 기숙사 방에서 울면서 지샌 수많은 밤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혼자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밤새 울곤 했는데, 감정 또는 애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흔히 그렇듯 그런 욕구는 이미 성숙해져 있던 나의 감수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수학보다 프랑스어에 매력을 느꼈으며 항상 수동적으로 독서만 했다. 그러다 어느 땐가 나는 할 수 있다면 시를 써보고 싶다는 욕망과 필요성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지 는 못했으나 다른 과목과 같이 평균점수는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어와 특히 작문에서는 마음에 드는 제목이 나올 때면 언제나 1등을 했다.

나는 많은 시를 썼고 시작(詩作) 대회에서는 1등 상도 받았다.

가장 놀라운 일은 내가 영세도 받지 않았는데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기도(식 전, 취침 시, 기상 시, 수업 전 등등)와 매일의 성찬 미사와 같은 습관적인 행사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매일 성찬을 받아 먹은 지 6개월이 지난 후 신부들은 내가 영세도 받지 않았다 는 사실을 알고 질겁을 했다. 나는 그 사실이 재미있었다. 사실 미사에서 내가 즐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빵조각을 무료로 맛보는 일 뿐이었다.

 

또 내가 사춘기를 맞이한 것도 역시 아홉 살 때였다. 나는 기숙사에 있는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모르는 쾌감을 몰래 알게 되었고 그것을 무척 즐기면서 외로움에 커다란 위안으로 삼았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것도 역시 아홉 살 때였으며, 그것은 그 나이의 아이들이 빠질 수 있는 사랑 치고는 강렬한 것이었다. 학교성적이 좋아져서 어머니는 나를 기숙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동의하셨고 나는 앙베르의 시립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되었는데,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아홉 살 난 브리지트였다. 그녀만 보면 부끄럽고 얼굴이 붉어져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신체검사 때에 부풀지도 않은 가슴을 내게 감추며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내 마음속에 부드러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연약한 이 여자를 보호하고 싶다는 강렬한 느낌을 갖게 했다.

이듬 해 나는 같은 학교 5학년에 올라갔고, 감히 한 마디 말도 붙여 보지 못한 첫사랑의 연인과도 계속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될 때 나는 애를 써서 그녀의 바로 앞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따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그 때 겨우 10살이었는데 생각은 온통 그녀에 대한 것뿐이었다. 반에서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나는 낙제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분에 6학년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공부 에 대한 흥미는 여전히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수업을 담임선생 님이 하지 않고 학과마다 선생님이 달랐기 때문에 매 시간마다 강의실을 옮겨 다녀야 했다. 따라서 그녀와는 언제나 멀찌감치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그 결과 나는 손에서 공부를 거의 놓아 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 로 나는 다음 해에 앙베르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꾼라라고 하는 조그만 마을의 기숙학교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곳은 퓨이 앙베레보다 더욱 나빴다. 거의 난방이 되지 않는 작은 방의 이층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더욱 나쁜 것은 규율이 없었기 때문에 키 크고 힘이 센 소년들이 기숙사를 지배했다. 내가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배운 것은 그곳에서였다고 생각한다. 힘센 애들이 약한 애들을 괴롭혀도 정당하게 처벌받지 않는 학교에 염증을 느낀 나는 어느날 걸어서라도 30킬로미터 떨어진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몰래 학교를 빠져 나왔다. 뒤늦게서야 교장이 차로 뒤쫓아 왔을 때 나는 이미 10킬로미터 지점을 걷고 있었다.

 

기쁘게도 나는 학기 중에 퇴학을 당해 앙베르에 돌아올 수 있었으 며, 다시 카톨릭 학교에 편입한 후 집에서 통학하게 되었다. 매일 길에서 브리지드를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녀는 이제 12살이었고 작은 가슴도 예쁘게 부풀어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공부가 점점 싫어진 나는 무단결석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사제들속에 내가 끼어 있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나를 영세시킬 것을 권했으나 다행히 어머니는 내가 더 커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자동차 정비공이 되는 일이었다. 그편이 카레이서가 되는데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자가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공부를 계속 하기를 원했고 정비보조공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이런 갈등은 내게 다시 시를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학교에 가는 대신 노트를 손에 들고 시골길을 돌아다녔다.

 

14살 때 나는 다른 정규학교가 받아주지 않는 아이들만 수용하는 몽도르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 곳에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만 모였는데 그 중 머리는 나쁘지만 꽤 재미있는 골칫거리들도 있었다.

그들 중 두목 격인 한 아이는 내 생애의 다음 10년간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쟈크라는 이름의 그 소년은 전기기타를 잘 쳤는데 나는 그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멋진 기타를 사달라고 할머니께 졸랐다. 마침내 기타를 구한 나는 쟈크에게서 코드 짚는 법을 배울 수가 있었다. 나는 내가 지은 시에 곡조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듣는 사람들이 모두 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라디오의 가요경연에 출전하기 시작했으며 매번 입상했다 내 노래를 좋아하는 식당의 여급과 처음으로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여름방학 중의 일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었는데 나의 기타연주가 여자들을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준 것 말고는 그녀를 통해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15살이 되던 이듬 해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어느 날 나는 기타와 작은 가방을 들고 흥미없는 공부와 기숙학교에 작별을 고한 다음 차를 얻어 타면서 파리로 향했다.

호주머니에는 2천 프랑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희망에 넘쳐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고 카레이서가 되기 위해 18세가 되면 운전면허를 따는데 필요한 돈을 저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운이 좋게도 강력한 가속도의 엔진을 가진 세단형의 자동차를 운전하는 한 남자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카레이서였다고 말했다. 나는 잡지책에서 읽었던 그의 차종과 그가 획득한 기록을 기억해서 말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기록을 전부 기억해 주는 소년을 만난 데 대해 놀라면서 기분이 으쓱해했다. 그는 한 때 서커스의 광대 노릇을 했으나 지금은 남서부에 정비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 방 하나를 제공해 주었다. 그 곳에서 일이 끝난 무용수 두 사람과 잡담하면서 나는 노래도 몇 곡 불렀다. 그 후 우리는 각기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실제로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 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다음날 아침 몰래 빠져 나온 나는 잘 곳과 내 노래를 듣고 채용해 줄 카바레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둘 다 찾지 못한 채 파리에서의 이틀째 밤은 지하철에서 부랑자들과 함께 보냈다. 남은 돈이 없었으므로 다음 날은 굶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희망도 없이 하루 종일 정처없이 걸어 다녔다. 그날 저녁 나는 카페의 테라스에서 아코디언을 켜고 있는 한 남자에게 손님들이 동전을 던져주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시작부터 일이 잘 되어 나는 살아났다.

 

이따금 아무데서나 자고 샌드위치를 사먹으면서 3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 동안 쌓은 실력이 보탬이 되어 어느 작은 카바레에 고용되었다. 하룻밤에 10프랑을 벌었으나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작은 하숙방으로 택시를 타고 가려면 15프랑이 들었다. 그러나 내 이름이 포스터에 인쇄되기 시작했다. (작은 글씨지만!) 매일 밤의 성공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내 이름이 큰 활자로 포스터에 인쇄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어느 날 코미디언 쟝 피에르 다라를 만났다. 그는 나의 스테이지 매너가 눈에 띌 수 있도록 배우수업을 받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내게 돈이 없는 줄 안 그는 내가 무료로 파리극단의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을 동안 듀랑의 강습소에 다녔으나 연극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만 두고 말았다.

 

나는 스키 선수이며 자동차 경주의 챔피언인 토니 사이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클로드 세레라는 예명을 지어 나 자신을 소개하곤 했다.

철자를 약간 수정해서 이름의 약자가 C.C.가 되도록 했다. 나는 여러 번 라디오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카바레도 여러 군데 뛰면서 노래했기 때문에 다소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라던 대로 18세에 운전면허를 따기 위한 돈을 저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카레이서가 될 수 없었다. 먼저 회사에 채용 되기 위해서는 명성을 얻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차로 여러 번 대회에 출전해서 가능한 한 우승을 해야 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경주용 차는 매우 비싸므로 그런 차를 사려면 계속 저축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노래를 계속 부르면서 돈을 모았다. 작사, 작곡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레코드를 녹음하여 큰 돈을 버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내 가방 속에는 150곡 정도의 레퍼토리가 들어 있었으므로 나도 레코드를 취입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방문한 첫 번째 레코드 회사는 3년간 계약을 제시했고 나는 그 서류에 서명했다. 레코드 회사의 지점장은 유럽 제1방송국의 국장이 기도한 루시앙 모리스로서 많은 유명가수들을 배출시킨 사람이었다.

첫 번째 레코드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며, 두 번째 레코드 역시 계피향 의 꿀(Le Miel et la Canelle)이라는 곡 때문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노래는 나중에도 자주 라디오에서 들려주곤 했는데 가사를 들으면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계피향의 꿀 ( Le Miel et la Canelle )

계피향의 꿀내음이라오.

바닐라에 사랑을 섞은 향기처럼

계피향의 꿀내음이라오.

영원히 사랑하게 될 나의 소녀들.

첫사랑은 갈색 머리의 마고

우리는 달빛아래 피리를 불었지.

그 눈동자를 쫓아 나는 걸었고

그 머리 결을 따라 나는 갔었지.

두 번째 사랑은 금발의 마리엘

우아한 그 몸매를 난 잊지 못해.

그 눈동자를 쫓아 나는 걸었고

그 머리 결을 따라 나는 갔었지.

세 번째 사랑은 붉은 머리의 마리온

그 예쁜 가슴과 귀여운 작은 치마

그 눈동자를 쫓아 나는 걸었고

그 머리 결을 따라 나는 갔었지.

친구여 우지 마오. 봄이 곧 오리니

그들은 젊고 당신 또한 스무 살이 되리니

그 눈동자를 쫓아 나는 걸었고

그 머리 결을 따라 당신도 가리라.

Le Miel et la Canelle

Ca sent le miel et la canelle

Ca sent la vanille et l’amour

Ca sent le miel et la canelle

Filles que j’aimerai toujours.

La premi`ere e' tait brune et s’appelait Margot

Le soir au clair de lune nous jouions du flutiau

Moi j’ai pris la route de ses yeux

Et le chemin sans doute de ses cheveux.

La deuxi`eme e' tait blonde et s’appelait Marielle

Les sentiers de sa rounde encore je me rappelle

Moi j’ai pris la route de ses yeux

Et le chemin sans doute de ses cheveux.

La troisi`eme e' tait rousse et s’appelait Marion

Pour sa jolie frimousse et son conquin jupon

Moi j’ai pris la route de ses yeux

Et le chemin sans doute de ses cheveux.

Ne pleure pas l’ami, demain c’est le printemps

Elles sont si jolies et tu n’as pas vingt ans

Moi j’ai pris la route de ses yeux

Toi tu prendras la route de ses cheveux.

 

그 당시 나는 여러 곳에 출연했고 지방공연에도 많이 참가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마침내 앙띠브에서 열리는 프랑스 가요 경연 대회인 황금의 장미에 선발되어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이끌어 온 존재들은 사실 내가 예술가로서 지나치게 유명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인생의 그 단계는 감수성을 발달시 키고 대중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익숙해지도록 하는데 있었으며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매일 아침방송에황금의 장미에 선발된 출연자의 명단을 예고 했지만, 대회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루시앙 모리스가 찾아와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를 대회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결국 황금의 장미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계속 노래를 부르면서 가난을 면치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는 경기장에 나갈 수 있는 차를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레코드를 취입했던 회사로부터 대리인의 지위를 제공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승낙해 버렸다. 몇 달만 일하면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확신되었다.

나는 광고대리인으로서 15구역의 책임자가 되어 보르도에 부임했 다. 거기서 일 년 동안 근무했다. 경주용 차를 살만큼 (마침내) 돈이 모아지자 나는 그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새로 산 차를 타고 충분히 운전연습도 하기 전에 친구가 사고를 내어 그 차를 부숴버렸다. 그 후 1년간 나는 남서부 지방에서 신곡들을 발표했는데, 부유한 친구하나가 자신이 스폰서가 될 테니 새로운 레코드를 내라고 권했다.

 

나는 시를 쓰면서 또 한 해를 보냈는데 마치 내 생활방식을 결정적으로 바꾸게나 하려는 듯 큰 교통사고를 내게 되었다. 몹시 피곤한 여행 중에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면서 깜박 조는 사이에 벽을 들이받고 말았다. 똑같은 지점에서 벌써 10명 이상의 운전사들이 같은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골절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3개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저축한 돈은 점점 없어져 갔다. 18살 에 시작하리라고 꿈꾸었던 내가 22살이 된 지금도 경기에는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다니.

 

나는 구경꾼으로 수많은 경기장에 다니면서 이 스포츠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을 느낄 수 있었으며, 많은 소년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카레이서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보아왔다. 나도 그들 이상으로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 분야로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은 스포츠에 대한 젊은이들의 정열을 이용하는 직업을 찾는 것이라고 자신했다. 글을 쓰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스포츠카 잡지의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전문잡지사와 연락 을 해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많은 다른 젊은이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레키브지의 자동차란에 경험을 묻지 않는 사진기사 구인광고를 보고는 응모했다. 내 신청서가 심사 중이며 서류대금으로 150 프랑을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그 대가로 회사가 보내 주는 필름을 받아서 마음에 드는 소재로 시험적인 촬영기사를 써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돈을 보내고 필름을 받아서 카레이스에 관한 기사를 작성한 다음 지정된 주소로 즉각 보냈다.

 

곧이어 광고를 낸 회사의 본사가 있는 디종으로 전화하라는 편지가 왔다. 후에 출판사의 설립자를 만났는데,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사람은 미국에서 사진업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했다. 자동차경기의 선수를 꿈꾸는 소년들을 위한 스포츠카 잡지의 창간에 관한 나의 아이디 어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수개월 후 발간될 신문의 편집인으로 나를 고용하겠다고 했다. 그는 인쇄소로 구입할 공장을 보여 주고 지배인으로 고용한 디종의 인쇄업자도 소개했다.

 

그리고 내 사무실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내 아내와 내가 살 집을 보여 주었다. 나는 내가 경기에 참가할 수 있고 또 그 세계와 계속 접촉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서 색칠한 경기용 차를 곧 발간될 새 신문의 선전용으로 굴릴 계획인데 내가 좋다면 경기업무를 취급할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곧바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터이므로 나는 그 회사의 경기담당 취재역의 자리를 수락했다.

 

한 주일 후 나는 아내와 함께 파리에서 디종으로 옮겼다. 나는 3개월 전에 결혼해서 아내는 이미 임신 중에 있었다. 나는 6월에 마리 폴과 만났는데 만난 첫날부터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3개월 이 지나서야 결혼한 까닭은 순전히 우리들이 종교적인 의식으로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안 그녀의 가족들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를 올려야 하는 등 낡은 격식에 가득차 있었다.

 

나의 디종 체제는 급료를 전혀 받지 못한 채 2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신문을 창간하겠다던 부유한 미국인은 사실은 동전 한 푼 없는 형무소에서 갓 나온 죄수였던 것이다!!! 그는 나처럼 카레이서나 사진기자가 되는 것을 꿈꾸어 온 5백 명 이상의 젊은이들로부터 150프랑에서 300프랑씩을 사취한 것이었다. 나는 두 달 동안 일했으나 무일푼의 원점으로 내 아이디어만을 안고 돌아왔다.

 

이때 비로소 나는 자력으로 출판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어머니가 곧 할머니가 되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어머니의 집 가까운 클레르몽 페랑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설립했다. 마침 스포츠카를 몹시 좋아하며 아무 담보도 없이 나를 신용해 준 인쇄업자 덕분에 잡지는 곧 태어나게 되었다.

 

잡지는 급속히 신장하여 삽시간에 그 분야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되었다. 나 자신을 위해 예비해둔 가장 신나는 일은 신형 모델의 차를 시험하기 위해 멋진 경기장 코스 마 뒤 끌로를 주행하는 일이었 다. 그 무렵 나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경주용 차의 세계에 소개되었으며 경기를 위한 차를 빌릴 수 있었다. 마침내 나의 꿈은 실현되었다. 익숙 해지지 않은 자동차로 시작해도 많은 경기에서 우승을 했으므로 나는 내가 이 분야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점차 운전기술을 향상시키면서 내가 사랑하는 스포츠카의 분야 에서 100퍼센트 완전하게 사는 멋진 3년을 보냈다. 나는 나의 한계를 극복 하고 자신의 반사신경과 행동을 보다 잘 컨트롤해 나가는 데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 모터의 소음이나 연료의 연소냄새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운전에 대한 순수한 감수성을 최고로 즐기기 위해 자동차 제조업자들에게 냄새 없고 소음이 적은 차의 생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꿈꾸어 왔음을 솔직히 말해야겠다. 그런데 19731213, 이 모든 것이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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