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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만남

 

만남

19731213, 그 특별한 날 나는 오베르뉴 화산의 분화구 중 하나인 퓨이 드 라 쏘라에 갔으며 거기서 처음으로 우주인, 더 정확하게는 엘로하 [Eloha, 복수형은 Elohim(엘로힘)]를 만났다. 나는 6일간 같은 장소에서 그를 만났으며, 그는 매일 한시간씩 첫 번째 메시지 진실을 알리는 책에 기술된 놀라운 계시를 내게 구술해 주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가 겪은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감히 이야기해야 할지 어떨지 망설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겠다. 우선 나는 회견 동안 나의 대담자가 말한 것을 급히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받아적은 기록을 깨끗하게 정서했다. 이것이 끝나자 나는 원고의 원본을 성실하다고 판단되는 출판사에 보냈다. 내가 알기로는 그 출판사에서는 비의(秘義)문학이나 공상과학류의 책을 출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인류 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이 메시지가 유사과학(類似科學)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비적인 모험담이나 괴기소설류 속에 파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출판사의 국장인 마르셀 줄리앙은 나를 파리로 오라고 했다. 그는 이 메시지가 굉장한 것이지만 메시지 앞에 나의 전기를 반드시 실어야 하고 또 몇 군데 수정해야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생애에 관해 100여 페이지를 써서 메시지 앞에 삽입하여 내 자신을 메시지와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책이 두껍지 않아 출판사에서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나는 메시지만이 출판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줄리앙에게 원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원고검열 담당자가 가져가서 지금은 없지 만 돌아오는 대로 우송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클레르몽 페랑에 도착하자마자 체스의 대가 잭 샹제르와 함 께 텔레비전에 출연해 달라는 전보를 받았다. 내 원고를 읽어본 출판사 의 부장 중 한 사람이, 믿든 안 믿든 그 내용이 굉장한 뉴스감이라고 생각하여 텔레비전 방송국에 출연을 의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쇼프로에 나갔고 이어 수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돕기를 원했다.

며칠이 지나도 내 원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출판사로 등기우편을 보내자 그들은 원고를 아직 찾지 못했으며 곧 찾는대로 보내준다는 대답이 왔다. 열흘이 지나자 이제 전화를 해도 내 말에 아무도 대답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직접 가서 알아보기로 작정하고 파리로 갔다.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관심을 가져 연락해 온 유명한 디자이너 크레쥬 씨가 원고가 어떻게 됐는지 진상을 알기 위해 출판사로 동행해주 기로 했다.

 

줄리앙 씨는 원고 검열자가 원고를 가지고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그가 어디 있는지 연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은 점점 이상하게만 되어 갔다. 결국 며칠 후 크레쥬 씨가 원고를 회수해서 내게 직접 돌려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들이 그 원고를 정말로 잃어버렸던 것인지 아니면 출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춘 것인지 의문스럽다. 출판사라는 곳이 그처럼 간단히 원고를 분실한다면 나는 작가들에게 원본을 보내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원고 분실사건에 마음 졸이고 또 메시지를 담은 책이 출간되는 대로 사고 싶다는 요청의 편지더미에 놀란 마리폴이 간호사 일을 그만 두고 이 특별한 책을 발행하고 배포하는 일을 돕겠다고 제의했다. 그렇게 하면 이 원고의 운용에 관해 지속적인 컨트롤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 되어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스포츠 잡지의 일도 즉각 그만두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의 중대함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비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974년 가을에 책이 마침내 출판되었다. 그 무렵 예측하지 못했던 신상의 급전환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위궤양에 가까운 고통을 몰고 와서 겨울 내내 심한 위염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명상과 호흡훈련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통증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6월에는 필립 보봐르가 사회를 보는토요일 저녁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했다. 그는 보조사회자에게 녹색 옷과 분홍색 안테나 를 씌워 화성인으로 분장시킨 다음 예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가 만난 우주인이 그와 닮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중은 내가 말한 짧은 답변 에 관심을 나타내었고 필립 보봐르에게 그의 불성실을 비난하는 투서를 보내었다. 수많은 편지에 당황한 그는 나에게 다시 한번 출연할 기회를 주었는데 겨우 몇 마디 더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나는 텔레비전 쇼가 끝날 때에 프레에르 홀을 빌어 이 방송에 관심을 갖는 시청자들을 위해서 며칠 안에 강연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강연을 들으러 올 사람들이 얼마나 올지 몰라서 150석의 작은 홀과 500석의 중간 홀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예약을 했다. 그런데 3천 명이라는 청중이 몰려온 것이다! 안전상의 이유로 정원만 입장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는 수일 후 2천 석의 대강당에서 다시 강연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백 킬로미터나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매우 언짢아서 돌아갔다.

모든 일이 마침내 잘 되어갔다. 경박한 질문만을 일삼는 몇몇 조롱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돕고 지지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를 때 보다 더 심한 무대공포 증을 느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장 어려운 질문에 부딪쳐도 대답이 저절로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약속한 대로 그들이 위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항에 답변하면서 나는 스스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일 후 두 번째 강연회가 열렸다. 지난번 강연을 듣지 못해 돌아간 사람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경우 임대료가 비싼 홀이 텅 비게 되지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특히 텔레비전 방송 이후 아무 선전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프랑스 스와르지 만이 두 번째 강연에 대해 3행짜 리 광고를 내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2천 명 이상의 청중이 몰려와 홀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승리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나의 사명이 성공할 것인가 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게 되었다.

 

강연활동

9월 이후 40여 차례의 강연을 하는 동안 나는 가장 빈번하게 질문되는 사항들을 파악하게 되었다. 마데그의 회원은 꾸준히 늘어갔으며 프랑스의 각 대도시에는 열성적인 멤버들을 중심으로 지부들이 형성되었다. 기자들도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대중에게 그대로 글로 쓰거나 말로 전함으로써 좋은 일을 해주었다. 반면 르 푸엥지는 거짓 보도를 해서 내가 반론권을 행사하여 기사정정을 요구했으나 아예 무시했다. 그 외에 그 지방의 유일한 일간신문이라는 이점을 가진 라 몽타뉴지는 내가 클레르몽 페랑에서 강연회를 연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기를 거부했다.

 

이 신문의 뉴스담당 국장을 만났을 때 그는 내 이름이나 활동을 일체 보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프랑스 국영 텔레비전 (ORTF)에 출연했을 때 자기들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울한 이야기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그들은 포르노영화를 위한 전면광고를 게재하면서도 강연회를 위한 광고마저도 사지 못하게 했다. 르 푸엥지는 마데그 멤버들이 우주인과 만남이 있었던 장소까지 산책한 사실을 엘로힘과 접촉시도 실패로 끝나다라는 허위의 내용으로 기사를 썼다. 이런 짓들 은 이제 막 일어서려는 단체를 조롱하려는 의도에서였다 .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진 신문이 2천 년간 강탈의 역사를 가진 교회에 대항하는 것보다 마데그를 공격하는 쪽이 분명 훨씬 쉽고 덜 위험했으리라. 그러나 진실을 은폐하는 자나 왜곡하는 자는 언젠가 그 잘못을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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