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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장 위험한 종파(Sect) : 군대

종교, 성, 정치 등 모든 면에서 자기와 다른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관용과 비폭력하에 자기개화를 이루는 사회, 이것이 미래사회의 모습이어야 한다. 인종적, 성적, 종교적 내지 정치적인 차별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원시적인 작태를 그만두고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와는 다른 생활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일도 이미 없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종교, 이것을 종파라고 말한다.

타인의 관능적인 생활, 이것을 악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더욱 더 관용할 수 있도록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면 2천 년 전에는 그 사람이 하나의 종파에 속한다 하여 어쩌면 사자우리에 던져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그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방법으로 새로운 종교에서 가치 있는 길을 발견한 젊은이들을 재판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내 이웃사람이 자기 배꼽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선언하고 게다가 천 명의 사람들에게 운 좋게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 이들이 그 사람을 위해 옥좌를 짓는다고 하자. 이 경우 그들이 그것을 바라는 만큼 그들 스스로도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승인한다면, 그들의 종교를 자유로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타인의 신앙이 당신의 마음을 혼란시킨다면 그것은 당신 이 생명과 세계에 대한 당신 자신의 관념에 있어서 확신을 갖지 못한 까닭이다.

성생활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남자나 여자가 하루에 세 번 성교를 함으로써 성적 평형을 유지하는 생물학적 리듬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성급하게 그들을 변태성욕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각기 자신 의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타인의 관능적 생활이 악덕으로 간주되어 온 원인이다.

공인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세뇌의 희생자가 되어 온 것을 생각하면 사회는 아직도 관용정신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으며 특히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불관용의 정도가 과도한 경향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육체적 평형이나 정신위생에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지나간 중세의 ‘종교재판 ’ 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다만 그것 이 이전의 고문보다 더욱 교묘한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다를 뿐이다. 결국 정신이상으로 인정해서 그 사람 을 의학상의 보호처분, 즉 정신병원에 수감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병원 은 자칭 자유의 나라들에 있어서도 정신상 혹은 종교상의 ‘이단자들’ 을 위한 ‘강제수용소’ 와 똑같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소련에서 반체제파를 강제수용소에 보내는 것과 같은 세뇌가 행해지고 있듯이, 비전체주의 국가나 전통적인 대종교에 있어서는 이미 추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아주 똑같은 수단이 감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곧잘 특정 신흥종교 (흔히 경멸적인 의미를 붙여 섹트 -- 종파 -- 라고 부른다) 가 그 젊은 신도들에게 가하고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폭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신 및 육체적 폭력을 행해 온 지금까지 전무후무 한 가장 큰 공인된 세뇌사업인 병역에 관해서 사람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대체 젊은 소집병은 어떤 꼴을 당하는 것일까? 맨 먼저 각종의 물리적 변형 (머리깍기, 제복착용 등) 에 의해 개성의 박탈이 최대로 행해진다. 다음 개인의 본래 개성 이 약해지면 이번에는 군대가 기대하는 별도의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조건부가 행해진다. 이것은 기계적 동작 (도보, 전진, 차려 등)을 심어 주기 위한 교련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일거리를 주고 휴식시간은 아주 짧게 해서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고, 또 식사는 양이 적고 질이 나쁜 것 (단백질 결핍으로 뇌가 징벌에 민감해 진다) 을 줌으로써 앞서 조건화에 의해 만들어진 개성을 통제한다. 언제 받을지 알 수 없는 징벌이라는 다모클레스의 검 (머리카락 한 개로 머리 위에 매달아 놓은 칼 : 끊임없는 위험을 의미함), 잡역이나 며칠씩 계속되는 엄격한 외출금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정신적인 폭력은 항상 존재한다. 상관은 항상 옳다는 이유로 그것에 대해 호소 할 수단도 주지 않는 육체적 폭력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병역이야말로 세뇌의 진짜 온상이므로 세뇌라는 주제가 주목받고 있는 이상 병역에 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강한 조건화 조직에 있어서 젊은 소집병이 불안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기분으로 특히 그 의미를 이해함 없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이 행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세뇌과정의 목적이다. 그것은 명령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인간이든 어떤 수단 에 의해서든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또 몇 백만이라는 주민 이 사는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일을 간단히 행하는 로봇, 즉 꼭두각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현재 이렇게 조건화되었기 때문에 명령이 주어지면 몇 백만이라는 인간을 살육하는 보턴을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누를 젊은 이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여러 가지 ‘종파들’ 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 군대에서 야말로 진짜 세뇌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젊은 소집병에 대해서 행해지는 군대의 과정은 단순하고 웅변적이다.

가. 개성의 박탈

나. 필요한 방향으로의 조건화

다. 이상의 과정 을 거쳐 얻어진 개성의 통제

게다가 놀라운 일은 군대에서 의식주를 제공받고 정말로 끊임없이 갖가지 임무로 가득 찬 12개월을 마친 후 자유를 도로 찾았을 때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민간에서의 취직난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직업군인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고 스 스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젊은이들 의 대다수가 그렇게 조건 지어져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전의 ‘비밀군사조직’ (1961 ~ 63 알제리아의 독립을 반대했던 우익비밀군사조직), 인도차이나의 군인, 외인부대의 병사, 미국의 ‘해병대’ 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너무나 조건 지어졌기 때문에 시민생활로 복귀했을 때 그들은 사회복귀에 실패하고 폭력과 강도생활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천재정치에 의한 정부는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조직적인 세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이 문제를 연구 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나치스 당원과 같은 전범들이 “우리들은 명령 을 수행한 데 불과하다.” 고 언제나 책임회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련에서 반체제파를 고문하고 있는 자들도 재판에서 자기들을 변호할 때는 똑같이 말할 것이 틀림없다. 알제리아, 인도차이나,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폭력행위에 걸린 자, ‘히로시마’ 에 원폭을 투하한 자에 관해서도 똑같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같은 굴속의 너구리들인 것이다. 군대야말로 인류의 제일 큰 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고 더구나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공언하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대는 그들이 명령을 내렸을 때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한 살인의 책임을 젊은이들에게 떠맡기고 만약 자기들 이 비난을 받을 경우 자기들은 단순히 명령의 수행자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정신적으로 정상인 사회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자기가 범하는 폭력에 대해서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책임지며, 또 명령을 실행한 경우는 명령을 내린 자와 똑같이 명령을 실행한 자도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말살하려고 살인청부업자 를 샀다고 할 때, 그 살인청부업자가 명령을 시행한 것뿐 이라는 이유로 무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직무가 무엇이든 여러 가지 의미로 책임 있는 인간 에 의해 사회가 구성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다른 사람에게 발포를 허용 받은 총살반의 모든 인간은 살해명령을 내린 자와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인간이 제복이나 직무를 구실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거부하는 날이 도래할 때에 세계평화의 실현은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한 모든 재판관과 배심원은 그 사람이 스스로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 때는 부당하게 부과된 처벌과 똑같은 벌을 받거나, 혹은 적게라도, 관련된 부정의 희생자가 실제로 받은 벌과 똑같은 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언제나 좁은 도량으로 자주 근거가 희박한 추측이나 ‘심증’ 을 바탕으로 유죄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나 배심원도 더욱 더 진지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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